F.A.

3 Dots

▪ 발레 공연 <모댄스>가 패션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하여 발레와 패션의 콜라보 무대가 화제가 되었다.
▪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샤넬의 대담한 패션 철학은 여성복 뿐 아니라, 발레 복식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샤넬이 발레 디자인을 선보인 지 100주년을 기념해, 2024 오트꾸튀르에서 발레 코어를 접목한 의상들로 컬렉션을 구성하였다.

 


 

“샤넬은 강한 성격과 힘을 지닌 동시에 연약함도 지녔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예술성을 끊임없이 추구했지만, 결국 혼자 남겨진 여성이었죠. 그 이미지를 발레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 스베틀라나 자하로바(Svetlana Zakharova) 인터뷰 중 –

 

세계적인 프리마 발레리나 아솔루타 스베틀라나 자하로바(Svetlana Zakharova)가 주역이 되어 선보이는 발레 공연 <MODANSE(모댄스)>가 2024년 4월 17일부터 4일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내 초연될 예정이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정상 발레리나의 4년 만의 내한 공연이자 샤넬과 발레의 콜라보 무대로 시작 전부터 이미 큰 화제를 모았다. 공연을 위해 샤넬 패션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해 80여 벌의 무대 의상을 제작한다고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기존의 발레복이 아닌 샤넬과의 협업으로 제작된 의상은 어떤 분위기를 자아낼지 관객들의 기대를 모았다.

 

공연의 타이틀인 <MODANSE(모댄스)>는 프랑스어로 패션을 뜻하는 Mode와 춤을 뜻하는 Danse가 더해진 합성어로, 패션과 발레의 결합을 직관적으로 담고 있다. 공연은 2019년 6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더블빌(double bill)로 구성되어 “가브리엘 샤넬”과 “숨결처럼” 두 편의 단막 발레로 진행된다.

 

1막 공연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에서는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이자 샤넬의 창업자 코코 샤넬의 일대기를 자하로바를 주역으로 그려냈다. 사랑과 이별, 패션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삶과 업적을 No.5 향수, 리틀 블랙 드레스 등 전설적인 창조물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코르셋과 거추장스러운 장식 등 고전 복식의 굴레에서 여성의 신체를 해방시키고자 했던 샤넬의 혁신적인 도전과 창의력이 돋보인다.

 

2막 공연 “숨결처럼(Come un Respiro)”은 2인무와 자하로바의 솔로 댄스로 구성되며 고전 복식 작품처럼 음악에 맞춰 신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코르셋을 연상시키는 관능적인 무대의상과 절제되고 짜임새 있는 헨델의 바로크 음악이 잘 어우러진다.

 

이렇듯 샤넬의 무대의상과 발레의 아름다운 몸짓을 통해 코코 샤넬의 일대기를 들여다볼 수 있어 시작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던 모댄스는 국내 팬들의 큰 기대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막을 올리지 못했다.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무용수들과 함께 공연의 주역이었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측근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고, 부득이하게도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취소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침략 정당화”에 대한 반발로 러시아와의 문화 협력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고 공연 기획사 인아츠프로덕션은 아티스트와 관객의 안전에 대한 우려 등으로 취소를 결정했다. 이미 2021년에 코로나로 인해 한차례 무산되었던 이력이 있기에 그런지 이번 모댄스 내한 공연 취소는 더 아쉬움이 컸다.

모댄스 포스터 속 자하로바 ⓒ 인아츠프로덕션
샤넬이 제작한 무대 의상 ⓒ muzarts 인스타그램

코르셋으로부터의 해방, 샤넬만의 대담한 패션 철학

프랑스의 대표적인 명품 패션 하우스인 샤넬은 패션, 하이 주얼리, 아이웨어, 향수, 화장품 등을 제작하고 판매한다. 디올,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대부분의 럭셔리 브랜드는 여성복과 함께 남성복 라인이 있다. 하지만 샤넬은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 속에서도 향수와 화장품 등 뷰티에만 한정해 남성 제품 라인을 운영 중이며 의복에서는 별도의 맨즈 컬렉션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샤넬이라는 브랜드에게는 여성이란 존재의 의미가 크다. 샤넬의 창립자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장식을 싫어했다. 남성복에서 주로 사용했던 기능적 소재와 디자인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심플하고 편안한 여성복을 만들었다. 결국 그녀는 답답한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면서 오늘날 여성 패션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다.

 

리틀 블랙 드레스, 트위드 수트, 투톤 펌프스 등 샤넬의 대표 의상은 현대 여성복의 시초가 되어 심플한 디자인의 현대 패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샤넬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우아함을 더해 샤넬만의 여성복 스타일을 만들었다. 특히 니트웨어와 져지(jersey)는 여성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샤넬의 대표 소재이며, 진주 목걸이와 카멜리아 장식은 샤넬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샤넬은 영화, 음악, 무용, 미술과 같은 예술의 애호가였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발레 안무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 등 당대 예술가들과 가까이하며 깊이 교류했다. 샤넬은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예술은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녀는 예술가를 후원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혁신적이고 대담한 패션 철학을 무용계에도 적용시켰다.

1959 f/w 컬렉션 트위드 수트&샤넬 슈즈를 착용한 모델 ⓒ Chanel, V&A
진주목걸이와 니트 소재로 만들어진 옷을 입은 모델 ⓒ Chanel, 마리끌레르

니트로 일으킨 혁명

그러다 1913년 러시아 발레단 발레뤼스(Ballets Russes)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을 본 이후 큰 감명을 받아 무용계 후원과 협업을 이어오게 되었다. 1924년에는 무용수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불필요한 장식으로부터 무용수를 해방시키는 의상도 제작했다. 선구적인 발레뤼스(ballet Russes)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의 작품 르 트랑 블루(Le Train Bleu, 스포츠를 풍자적으로 다룬 작품)의 의상을 담당하며 처음으로 스포츠웨어를 선보였다.

 

수영, 골프, 테니스에서 영감을 받은 이 의상은 혁명적이었다. 니트 소재로 제작해 현대적이면서도 일상생활에 접목이 가능한 편안함을 구현했다. 소프트 스트라이프 탱크톱과 반바지, 그리고 스트라이프 패턴의 긴 양말은 무용수의 유연함을 나타내기에 적합했다. 당시 의상 일부는 현재 런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때 제작된 니트 소재는 칼 라거펠트의 1998 s/s 컬렉션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1929년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작품 아폴론  뮈자제트(Apollon Musagete)에서는 코르셋을 연상시키는 클래식 튀튀(Tutu, 발레리나의 스커트)에서 벗어나 단순한 형태의 튀튀를 디자인하는 등 발레 복식사의 변화를 이끌었다. 무용수의 레오타드 복장이 샤넬의 디자인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9년 바카날(Bacchanale)까지 가브리엘 샤넬은 계속해서 발레 의상을 제작하며 춤과 예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으며, 직접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샤넬이 세상을 떠난 뒤, 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정신을 이어갔다. 1986년에는 독일 안무가 우베 숄츠(Uwe Scholz)의 발레 공연 의상을 2년 연속 만들었고, 2009년에는 100시간을 넘게 들여 The Dying Swan의 엘레나 글루드지즈(Elena Glurdjidze)의 의상을 제작하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안무가와 지속적으로 협업하며 무용 의상을 만들었다. 심지어 칼 라거펠트는 사망하기 1년 전에도 데카당스(Decadence)의 볼레로(Boléro)섹션의 의상을 작업했다고 한다.

 

현재 샤넬 하우스는 창립자 가브리엘의 예술 정신을 이어받아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주요 후원사로 나서며 무용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2019년에는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가 파리 국립 오페라의 갈라 쇼 의상을 디자인했는데 르마리에(lemarie) 공방과 함께 장인의 섬세한 꽃장식을 새겨 넣었다. 실크 오간자 위에 손으로 그려진 블랙라인과 실크 꽃잎들로 만들어졌다. 지금도 샤넬은 VIP 고객을 대상으로 발레 공연 티켓을 제공하며 계속해서 발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아폴론 뮈자제트 속 단순한 튀튀를 입은 무용수 ⓒ Bolshoi
샤넬 2024 S/S 오뜨꾸뛰르 쇼 ⓒ Chanel, Noblesse

샤넬 2024 S/S 오뜨 꾸뛰르에 등장한 발레 디자인

“샤넬에게 무용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발레단, 안무가, 무용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레 의상을 제작하기도 하죠. 이번 컬렉션에서는 튈, 러플, 플리츠, 레이스로 구성된 우아하고 가벼운 디자인을 통해 몸의 힘과 의상의 섬세함을 조화롭게 결합하고자 했습니다.”

– 샤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 인터뷰 중 –

 

올해는 샤넬이 무용 의상 제작에 참여하며, 발레 디자인을 선보인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는 Chanel 2024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통해 발레 코어를 접목한 의상들을 선보였다. 오프닝은 실제 발레리나 출신 브랜드 뮤즈 마가렛 퀄리(Margaret Qualley)를 모델로 등장시키며 그 의미를 더했다. 런웨이 중앙에는 가브리엘 샤넬의 담대한 패션 철학의 상징인 거대한 샤넬 단추 오브제를 배치하여, 남성복의 편안함에서 착안해 여성을 불필요한 장식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던 그녀의 디자인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총 56벌의 컬렉션으로 발레리나의 튀튀 스커트를 연상시키는 튤 소재와 화이트 레오타드 스타킹으로 발레 코어를 표현한 이 쇼는 안팎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샤넬 공방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날아갈 듯 가벼운 소재와 꽃무늬 자수, 섬세한 시퀸 장식 등 디테일을 통해 시각적으로 발레의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 덕이었다. 드레이퍼리, 시퀸, 브레이드, 아플리케로 장식된 시스루 스커트, 롱 드레스, 점프슈트, 케이프 등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24년 S/S 오뜨꾸뛰르의 핵심 테마는 대조(Contrast)였다. 샤넬에서는 뻣뻣한 소재의 트위드와 대비되는 가벼운 질감의 튈을 활용해 분명하게 대조를 드러냈다. 전반적으로 몸에 딱 맞는 트위트 자켓과 튀튀와 같은 스커트를 입은 피스들로 컬렉션을 구성하였다. 발레뤼스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은 핑크와 화이트 색상을 통해 수채화 팔레트로 표현했다.

 

100년 전 발레복 디자인에서 출발한 샤넬의 발레리나 슈즈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신발계의 스테디셀러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요즘 떠오르는 발레 코어 역시 샤넬의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편안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무드를 연출하는 발레코어룩. 가브리엘 샤넬의 예술에 대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스포츠웨어와 형태가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직까지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두른 채 무용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샤넬의 대담한 패션 철학이 여성복과 발레 등 패션사에 많은 발전을 이끈 것처럼 앞으로 패션사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칠 디자이너가 나타날 그날이 기다려진다.

모댄스 1막 공연 - 가브리엘 샤넬 ⓒ 인아츠프로덕션
모댄스 2막 공연- 숨결처럼 ⓒ Batyr Annadurdiev